수르 광야와 마라 엘림
히브리어로 ‘수르’라는 말은 ‘단단한 바위’를 뜻하고, ‘마라’는 ‘쓰다’, ‘괴롭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수르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을 만났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광야와 마라의 쓴 물로 예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수르 광야는 사막으로, 먼지만 날리는 곳입니다. 태양을 피할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곳입니다.
마라는 쓰고 괴로운 인생 현실을 뜻합니다.
질병을 만난 분들은 질병의 고통으로 쓰고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게 됩니다.
물질이 있다가 없게 되면 그것도 괴로운 것이며 쓴 고통입니다. 사회에서 열심히 생활하였지만,
한참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도,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원하는 진로를 가지 못하는 것도
수르 같은 광야의 고통이요 마라의 쓴 물입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도 수르 광야이고 마라입니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다 해도 사실 얻고 보면 마라의 쓴 물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했던 입술이 사흘 만에 원망하는 입술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마라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마라는 가능성이 보이는 땅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이 아니면 멈춰 서면 안 됩니다. 마라에서의 사건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망에서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홍해에서의 찬양이 마라에서의 원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겨우 사흘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오래 참지 못함을 알기에 우리는 함부로 그들을 욕하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자주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원망할 수는 있지만, 그 원망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망이 기도로 바뀌지 않는 한 인생의 쓴 물도 단물로 바뀌지 않습니다. 마라의 쓴 물조차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는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라는 환경적인 조건에서 볼 때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때, 순종하기 어려운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순종해야 할 때요, 바로 그곳이 순종해야 할 장소가 돼야 합니다.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때와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 우리를 치료해 질병이 하나도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마라에서 엘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이 모세의 기도를 통해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마실 수 없는 물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바뀐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실컷 마실 수 있는 많은 양의 물을 만들어주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마라를 지나 엘림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남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 엘림이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마라에 머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엘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으리라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믿음으로 걷고 또 걸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삶의 자리가 마라입니까, 아니면 엘림입니까. 쓴 물을 마시며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삶의 자리는 틀림없이 마라입니다. 그러나 생수를 맘껏 들이키며 평안한 쉼을 얻고 있다면 그 삶의 자리는 틀림없이 엘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마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마라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안식처는 바로 엘림입니다. 우리는 마라를 떠나 엘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려했던 만큼 엘림은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 있습니다.
엘림의 뜻은 '큰 나무'라는 뜻입니다. 엘림은 샘물 12개와 종려나무 70주가 있는 비옥한 오아시스인데 이는 완전수인 70(7*10)이 상징하듯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